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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충청남도 부여군의 두 종족마을 간의 신분갈등이 한국전쟁기에 어떻게 폭발하고 또 전쟁 이후에 어떻게 수습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마을은 진주 강씨의 종족마을이고, B마을은 풍양 조씨의 종족마을로서, 두 마을은 금강변에 자리잡은 이웃 마을이다. 하지만 A마을은 신분상으로 보면 민촌이었고, B마을은 반촌이었다. B마을의 풍양 조씨들은 조선후기, 특히 19세기 풍양 조씨들이 권세를 쥐고 있던 세도정치기에 부여지역의 최고 명문가로서 위세가 대단했다. 또 풍양 조씨는 이 마을이 속한 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따라서 조씨 문중과 B마을의 위상은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주 강씨의 선조들은 처음에는 B마을에 들어왔다가 A마을로 이주하였는데, B마을 풍양 조씨들의 위세에 항상 억눌려 지낼 수밖에 없었다. B마을 사람들은 A마을 사람들을 하시하였고, 또 여러 가지 일로 괴롭히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에 A마을에서도 관직을 가진 이를 배출하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에는 민족운동가와 대종교 간부들을 배출했다. 또 1930년대에는 마을의 청년들이 야학운동 등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로 인해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A마을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또 해방 이후에는 이 마을의 강진구가 부여군의 건준과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됨으로써 마을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강진구는 인민위원장을 그만두었고, 일제강점기에 구속된 바 있었던 최재봉과 젊은 청년들은 점차 좌익운동쪽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마을은 부여군의 모스크바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부여군에서도 보도연맹 맹원들이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낙화암에서 처형되었는데, A마을에서도 4명이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리고 인민군이 부여군에 들어오자 처형된 이들의 유가족들은 이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유가족들은 당시 A마을이 속한 Y리의 이장 조동갑(가명)이 밀고하여 4명이 끌려가 처형되었다고 믿고 인민재판을 열어 그를 처형하였다. 또 B마을의 조동을(가명)을 역시 인민재판을 열어 처형하였는데, 독직혐의 등이 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B마을의 우익 성향의 주민들과 지주들은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A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이 속한 X면의 면당위원장, 치안대장 등을 맡았다. 하지만 인공 치하는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인민군이 물러간 뒤 A마을 주민들은 경찰과 B마을 주민들의 포위에 의해 성인 남자 거의 전원이 경찰지서에 연행되어 갔다. 그리고 조동갑, 조동을 사건에 깊이 관계하였던 이들은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결과 6명이 처형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7명은 4-5년 정도씩 옥살이를 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또 면당위원장, 치안대장 등을 한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없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또 A마을 주민들은 B마을 주민들이 몰려와 값나가는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A마을 주민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라고 말한다. 전쟁을 거치면서 두 마을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리고 두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A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B마을 아이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 마을 청년들은 씨름대회, 쥐불싸움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들의 한을 풀고자 했다. 두 마을 사람들은 이제 치열한 경쟁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금강의 제방 축조를 위해서는 두 마을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든가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으로 인해 두 마을은 점차 화해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64년 두 마을 사람들은 화해를 위해 강호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강호동지회는 우선 두 마을 사람들의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또 제방 축조를 위해서도 여러모로 힘을 썼다. 그런 가운데 B마을 사람들의 A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점차 달라져갔다. 전쟁을 거치면서 B마을 사람들은 A마을 사람들에 대한 신분적 차별대우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강변의 제방 축조로 수십만 평의 땅이 안전한 농경지로 바뀌었고, 오늘날 두 마을은 모두 비닐하우스 수박농사를 통해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부촌 마을로 바뀌었다. 그리고 두 마을은 이제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상호 협조를 우선시하고 있다. 하지만 두 마을은 여전히 강한 경쟁의식과 강한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다. 심지어 출향 인사들까지도 아직도 마을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두 마을의 발전을 위해 지원을 하고 있다. 다른 종족 마을들이 대부분 종족마을로서의 성격을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두 마을의 사례를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특수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전쟁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반촌과 민촌이라는 두 종족마을 간의 신분 차이를 둘러싼 갈등관계는 한국전쟁기에 폭발하여 양자 모두의 희생을 낳았고, 이러한 역사적인 경험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한편에서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대등한 관계, 그리고 상호 협조관계의 수립을 가져오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강한 공동체 의식 위에, 신분이 아닌 새로운 목표, 즉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인 지위의 성취를 향한 상호간의 경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 제목
- 종족마을 간의 신분갈등과 한국전쟁
- 저자
- 박찬승
- 발행일
- 2005-06-24
- 학회명
- 충남지역 마을공동체의 생애와 정체성
- 개최지
- 충남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