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식민기지 영산포의 일본인 상인과 지주

  • 박찬승

초록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영산포는 일본인들의 식민기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것은 영산포가 영산강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면서 수륙교통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 그리고 배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영산강변에는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널려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인 상인들은 영산포에 본격 진출하여 미곡수집상을 하기 시작했고, 일본인 개인 지주 혹은 회사 자본들이 영산포에 들어와 대거 토지를 매입하거나 혹은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본국에서 직접 영산포에 진출한 회사 자본은 동척, 미쓰비시 계열의 동산농장, 한국흥농주식회사 등이었고, 개인 지주는 黑住猪太郞, 鳥越和夫 등이었다. 한편 목포 개항 후 상업활동을 하다가 초기에 영산포에 들어온 河野, 飯田, 杉本 등은 상업활동과 고리대를 하면서 영산포 부근에서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영산포에 진출한 상인들 가운데 유력 상인들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이들은 대부분 1902년부터 1912년 사이에 영산포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즉 비교적 초기에 영산포에 들어와 자리 잡은 이들이 영산포의 유력 상인이 된 것이다. 둘째, 이들의 상업활동은 주로 미곡수집, 비료판매, 농기구 판매 등 농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영산포의 유력 상인은 곧 미곡수집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토지에 투자하여 지주가 되고 있었다. 즉 상인 겸 지주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이들의 출신지역은 비교적 다양했지만, 대부분 규슈(九州)지역과 중부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연안의 縣 출신들이었다. 이들 지역이 조선과 가깝고 또 왕래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적극 진출했을 것이다. 조선 전체를 놓고 보아도 이들 지역 출신 일본인이 가장 많이 조선에 이주해왔으며, 영산포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영산포 일본인 지주들의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인 지주들은 회사형 지주와 개인형 지주로 나뉜다. 회사형 지주로서는 동척을 비롯하여, 동산농장, 전남상사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東拓은 半國家型 地主, 東山農場은 財閥型 地主, 그리고 全南商社는 現地 商業資本型 地主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들 일본인 지주들 가운데 특히 회사형 지주와 개인 대지주들은 러일전쟁 직후 조선에 진출하여 영산강변의 황무지를 불하받거나 싼 값에 매입하여 대규모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셋째, 소지주들은 초기부터 대부분 고리대금업을 겸하면서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담보로 잡은 토지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다. 고리대금업은 이들이 지주로서 토지를 늘려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高田家의 경우를 볼 때 일제 말기까지 지주들의 고리대금업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넷째, 소지주들 가운데에는 상인 출신이 많았으며,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지주경영을 겸하고 있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이처럼 영산포에 들어온 상인과 지주들은 미곡수집, 고리대, 그리고 지주경영을 통해서 짧은 시일 내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영산포라는 식민기지를 확고하게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산포는 내륙의 식민기지로서 목포라는 항구도시를 매개로 하여 일본의 오사카ㆍ고베 등 식민모국의 도시들과 연결되고 있었다. 즉 영산포의 지주ㆍ상인들은 식민모국과 식민지간의 네트워크 형성과정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이에 편승하여 커다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제목
일제하 식민기지 영산포의 일본인 상인과 지주
저자
박찬승
발행일
2009-10-30
학회명
항일독립운동과 나주
개최지
나주학생운동기념관